사색의 미학(休) ㅡ 내면의 일기

사유 - 자각의 기쁨/말씀의 진리

아미엘의 일기 중에서

풀.잎. 2026. 5. 9. 11:08

 

 

 

루게의 <<아카데미 1848년>> 일부분을 읽다.

인도주의와 신진 헤겔주의의 입장이 정치, 종교,

문예에 걸쳐 대가들의 직접적인 논설에 의해

제시되어 있다. 거기에 대표되고 있는 것은

지난 세기(18세기)의 철학주의파로,

추리와 이성에 의한 해결에 있어서는 전능하지만

건설에 있어서는 무능하다. 건설은 감정과 본능과

의지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철학 의식은 여기서는

실천력으로 간주되고 있고, 이지의 단련은

마음의 단련으로 간주되고 있다. 다시 말해 부분이

전체로 간주되고 있고, 시간적으로 최후의 것이

최초의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이 사람들에 의해

나는 이지주의와 윤리주의의 근본적 차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 파에서는 철학이 종교를

대신하려 한다. 그 종교의 원리는 인간이며,

인간의 정점은 사상이다.

따라서 그 종교는 사상의 종교이다. 

그것은 두 개의 세계가 된다. 그리스도교는

의지의 전향을 통해, 인도주의는 이지의 해방을

통해 구원을 가져오며, 또 그것을 가르친다.

한쪽은 가슴을 사로잡고 또 한쪽은 머리를

사로잡는다.양쪽 모두 인간을 그 이상에

도달시키려 하고 있다. 다만 그 이상이 다를

뿐이다. 내용상 차이는 없지만, 내용의 안배,

이런저런 내적인 힘에서 볼 수 있었던

우월 또는 지배권에 따라 다르다.

 

한쪽에서는 이지가 정신의 기관이며,

다른 쪽에서는 정신이 이지의

낮은 상태이다. 하나는 좋게 함으로써

밝은 빛을 지향하고,

다른 것은 밝은 빛으로 함으로써

좋은 것이 되게 한다.

즉 소크라테스와 예수의 차이이다. 

중요한 것은 원죄의 문제이다.

내재의 문제, 이원성의 문제는 이차적인 것이다.

그것이 해결되어도 원죄의 문제는 남는다.

삼위일체, 미래의 생활, 천국과 지옥은 도그마,

정신적 사상이 되지 않을 수 있고, 형식주의,

문자주의는 사라지더라도 인간의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구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떻게 하면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는가?

인간이라는 것의 마지막 뿌리는 책임인가?

과연 어느 쪽일까?

마지막 목적은 선을 행하는 것인가,

아는 것인가? 행동하는 것인가, 생각하는 것인가?

 

학문이 사랑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충분한 것이다.

그런데 학문은 스피노자의 지식에 대한 사랑,

열이 없는 빛, 장대하기는 하지만 비인간적인

관조적 체념밖에 주지 않는다.

비인간적이라는 것은 쉽게 전달할 수 없어서,

특권, 특히 가장 귀한 특권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윤리적 사랑은 개체의 중심을 사물의 중심에 두고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구원을,

영원한 생명의 싹을 품고 있다.

사상은 이 중심의 주위로 점점 퍼져가서 무한하게

커지는 원을 얼마든지 그린다. 어린아이의 얼굴을

한 천사와 제1급 천사, 이것이 이미 딜레마로서

구별이 되지 않고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잠재적으로

안다는 것의 가능성을 갖지만,

안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의

가능성이 되지 않는다.

이것이 인간의 두 가지 상태의 관계이다.

그래서 학문과 지식에 대한 사랑에 의한 단련은

의지와 윤리적 사랑에 의한 단련보다 낮다.

전자는 사람을 자아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이기심에서 해방할 수 있다.

후자는 자아를 자아 밖으로 쫓아내어 활동적이고

실천적인 것으로 만든다. 한쪽은 비평하고

정화하고 부정하며,

또 한쪽은 살리고 결실을 맺게 하고 긍정한다.

학문은 원래 어느 정도 정신적, 실질적이라 해도,

사랑에 비하면 여전히 형식적이다.

따라서 윤리적인 힘이 생명점이다.   

그래서 이 힘은 윤리적인 힘이

없으면 얻을 수 없다.

 

비슷한 것만이 비슷한 것에 작용한다.

그러므로 이성의 작용은 상태를 보다

좋게 할 수 없다. 실례에 따라 행동하라.

마음을 움직이는 것도 감정에 따르라.

사랑 이외의 것에 의해

사랑을 일으키려 하지 말라.

타인을 어떻게 하고 싶다면 스스로 그렇게 되어라.

말이 아니라 자신의 몸이 설교가 되도록.

본제로 돌아가 결론을 말한다면,

철학은 종교를 대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도는 혁명가였지만 혁명가는 사도가 아니다.

외적인 것으로 내적인 것을 구원하는 것은 

잘못이고 위험하다.

인도주의자의 사업은 부정적인 부분이 좋다.

그리스도교에 달라붙어서 외면적이 된

껍질을 벗겨준다. 그러나 포이어바흐와

루게는 인류를 구원할 수 없다.

인류에게는 철학자의 사업을 보완하기 위해

성자와 영웅이 필요하다. 

 

학문은 인간의 재능이며

사랑은 인간의 힘이다.

인간은 이지를 가져야 비로소 인간이 된다.

그러나 마음, 가슴을 지녀야 비로소 인간이다.

이지, 사랑, 재능, 이것으로 완전한 인간이 된다.

 

1851년 4월 7일 아마엘의 일기 중에서. 

 

 

요즘 다시 읽고 있는 아미엘의 일기 중에서

마음에 담아 보고 싶은 공감대를 만났지 싶다

휴일 아침 운동과 산책을 통해서

5월의 많은 꽃 향기와 풍경은 

천상의 세계가 따로 없구나 하는 

마음의 여유를 지니게 했었지 싶다.

그 평안함을 공부로 조금

담아 보는 시간이지 싶다.

 

2026.5.9.풀잎.

 

 

풀잎 채널

풀잎 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