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 미학(休) ㅡ 내면의 일기

사유 - 자각의 기쁨/말씀의 진리

고미숙 작가님의 특강 ㅡ 숫타니파타

풀.잎. 2024. 5. 14. 19:22

 

 

"바깥을 정복해서 나를 해방시키는 길은

이제 불가능하구나 " 를 깨닫고 

"내 존재 내면을 해방시켜서

삶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겠다."

이 비전이 불교거든요.

 

 

 

 

 

 

숫타니파타   ㅡ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고전 펑론가 고미숙 )  중에서 발췌

 

1강  - 환락의 늪에서 지혜의 바다로 

 

숫타니파타 들어보셨나요.

근데 또 꼭 안 들은 거  같지는 않는

어디선가 바람결에 들은 거 같긴 한데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는 이런 고전이죠. 

예. 그 예상처럼 불교 경전입니다.

 

제가 지난 10년 동안을 열하일기나 동의보감

같은 한국 고전 강의를 쭉 했었어요. 그런데

한국 고전이 이제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저절로 유불도가 이렇게

삼교회통하는 그런 식으로 구성이

돼있었어요.그러니까 열하일기 같은 강의는

유교와 관련된 거고 동의보감은 이제  도교

쪽에 가깝죠.그런데 유교와 도교는 한자로

된거고 중화문명권의 산물이기 대문에 굉장히

다르지만 친연성이 깊어요. 그런데 불교는

분명히 동양 사상이긴한데 인도 문명과

산스크리트어에서 온 거라서 굉장히

이질감이 있죠.

 

그래서 불교 신자라면 뭐 일찌감치 불경을

접할텐데  저처럼 이렇게 이제 지성과 사상의

측면에서 공부를 하게 되면 불교는 이제 굉장히

어렵고 너무 심오해서 가까이하기

좀 어렵다 이런 느낌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저도 이제 유교나 도교 이쪽의 공부를 하다가

몇 년 전부터 이제 본격적으로 불경을 배우게

됐습니다. 이제 왜 불경을 이렇게 꼭 공부를

해야 되느냐 이제 그 얘기는 앞으로

또 들려드릴텐데 어쨌든 이제 몇 년 공부를

해보니까 불교에 대해서 굉장히 무지한데

무지하면 편견이 많아요.

 

그러니까 알면 많은 것을 소통할 수 있는데

우리의 대부분의 불통은 무지에서 옵니다. 

그냥 모른다가  아니라 굉장히

많은 오만과 편견을 그 안에 내재하고

있는거죠. 그래서 이제 그 이야기부터

먼져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제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어떤 편견을

갖는가를 이제 제가 정리를 해 왔어요.

그랬더니 막연히 불교 그러면

아마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거 떠오르시죠

이거 들오 보셨죠. 무슨 뜻인지는 전혀

모르겠는데  왠지 굉장히 좀 허무한 느낌을

주죠. 아, 니힐리즘 아 ,모든게 정이구나

이렇게 오는 적막감 이게 아주 큰 불교에

한 무지로 있고요. 또 하나 적멸이니

정적이니 이런 표현 또 열반도 그렇고 이러면

굉장히 정적인 이미지를 줍니다.

그러니까 능동적이고 활동적인게 아니라

굉장히 수동적이고 뭔가 세속을 떠나야 될

것 같고 이런 느낌 그리고 이제

이탈속화 된 세계에서 열심히 수행을 한

다음에 결국 이제 자기의 개인적 해방을 꿈꾼다.

 

또 이런  오해도 있더러고요 그리고 이제 특히

동아시아 불교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 중에

하나가 반지성주의인데 언어도단이라고

들어보셨죠? 언어도단 언어의 길이 끊어졌다. 

언어의 길을 끊어라. 불립문자 못 들어

보셨어요? 들어보셨을 텐데 시험에 자주

나옵니다. 그러니까 문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문자나 언어로 된 것들은

다 망상이다. 그래서 제가 예전에 본 어떤 스님

에세이 같은 데 보면 처음 출가를 했는데 몇 년

동안 신문을 못 읽게 했다고 그래서 막 신문이

바람에 이렇게  신문 쪼가리가 날리는데

그 글자를 보고 막 너무 그리워서 눈물을 흘리는

이런 장면이 있어서 아 ! 언어와 지성은

불교하고는 굉장히 다른 거구나 이런 식의

편견을 갖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제 가장 결정적으로 굉장히 이제

나이가 들어서 산전수전 겪은 다음에나 공부하는

거 이런 생각이 있으시죠?

그래서 지금 별로 불경을 고부하겠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드시죠? 그래서 이제 노년의 사유다

또 이런 관점이 있고 굉장히 많은 오해와

편견들이 있는데 그걸 이제 잘 종합을 해보면

제행무상, 무상, 무아, 또 열반, 적멸, 이런

언어들이 이미지로 다 환기하는 것들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사상을 탐구해보고 그것에

대해서 비판을 하고 이런 게 아니라 그냥 막

지나가는 언어들의 이미지에 이렇게 다 걸려

있었구나 그래서 이제 그런 느낌을

김용옥 선생님 책을 보니까 이 무상이라든가

이런 언어가 일본을 통해서 번역이 되면서

더더욱 일본적인 그런 감상하고

많이 결합이 돼서 우리가 더 이 언어들을

쓸쓸하고 좀 적막하게 느낀다. 저는 또 평소에

좀 왜 저렇게 이미지로 우리가 사유를 했을까.

이런 이제 의혹을 갖고 있어서

굉장히 공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게 무지와

편견이라는 걸 알았다는 것은 제가 불교에

입문해서 불교는 이런 사상이

아니라고 생각을 하게 된 거잖아요.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데 된 계기를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면 제가 한 십면 년 전에 뉴욕 주에

있는 대학에 이렇게 잠깐 머무는 적이 있었는데

그때 어떤 인연으로 불교를 이렇게 정의하는

굉장히 이제 특별한 처음 들어보는

그런 정의를 제가 만나게 돼요.

 

그게 뭐냐면 "불교가 무엇인가 " 라고 했을 때

사실 지금 그 분이 스님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어요. 

근데 " 행복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

이렇게 정의를 하셨어요.

굉장히 놀랍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존재는 행복해야만 한다는 거에요.

존재의 본질 본성은 행복인 것이예요.

이런 정의를 저는 못 들어 보고

행복을 위해 연심히 노력을 하고 애를 써야 한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이렇게 했지

존재 자체가 행복이라는 말은 처음 들었는데

" 이것이 불교라는 거예요. "

 

그래서 굉장히 충격을 받고

이 말이 너무 멋있어서 제가

<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를  쓸 때

" 공부란 무엇인가"에 이걸 좀 차용했습니다.

공부는 존재의 본질이다.

그래서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그래서 이 말로 굉장히 사람들이 놀라워하셨죠.

 

그리고 불교가 허무나 적멸의 사상이 아니라는

거고 또 하나 불교의 세계관은 이 세계는 다

괴롭다는거예요.

" 인생은 괴롭다 " 에서 시작해요.

그래서 어떻게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까 가 불교의

출발이예요. 부처님이 출가한 것도 그것이었고

모든 수행자들이 질문하는 게 왜 삶은 이토록

괴로운가? 존재는 행복 그 자체인데 이런

질문이거든요. 그래서 그럼 너무 비괸주의아냐?

이렇게 저도 생각을 했어요. 뭐 그렇게까지

비관적이지? 살다 보면

재미있는 일도 있고 뭐 즐거운 일도 많고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이거는 비관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삶의 실상인거예요.

 

본질은 행복이고 충만인데 세속의 삶을 봤더니

생로병사가 다 괴로움이더라.

여기서 출발하는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아주 굉장히 쿨하고 객관적인

진단인거예요. 근데 예전 같으면 저도 여기에

동의를 안 했을 텐데 이제 나이가 들고 주변에

많은 사람을 만나보니까 모든 사람들이

자기 삶을 상처로 구성하는 걸 목격하게

됐습니다. 여러분도 본인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면

다 슬픔이 먼저 차오르실거에요.

사람은 다 자기 삶은 슬픔과 괴로움으로

구성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이게 이제

저한테 굉장히 아주 강열하게 다가왔어요.

 

그러면 어떻게 괴로움에서 벗어날까요?

그래서 이제 부처님의 비유 중에

화살을 맞았으면 화살을 뽑는 게 지금

랙심인 거죠.어떻게 화살을 뽑을 것이냐

그런데 뭐 화살이 어디서 왔는가.

또는 이 화살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가.

뭐 이 사람은 나를 좋아할까. 싫어할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망상인 거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화살을

뽑을 것인가. 어떻게 괴로움에서 벗어날

것인가는 너무나 실용적이고 너무나 구체적이고

그리고 당장 마음의 방향을 바꾸면 그만큼의

괴로움을 벗어납니다. 검증이 가능한 거예요.

그리고 불교 자체가 도시 문명의 산물이예요.

 

2천 5백 6백 년 전에 인도에서 불교가 등장하는

장면은 종족 국가에서 도시국가로 변모할 때

이 종족 국가들을 다 병합해서 큰 제국이 형성이

되는 그런 시점에 불교가 탄생합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그랬고  부처님 승가 공동체는

도시와 숲 사이에 있어요. 그러니까 도시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평생 유행을 하신 곳도 도시고요

그러니까 왜 그러냐면 탁발을 위해서 매일

아침 도심으로 들어가야 돼요.

 

이 세속의 운둔의 공간에서는 생존 자체도

불가능하고 이 깨달음도 의미가 없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보면 도시의

노마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도시가 이제 막 번성할 때 교역, 계약,

그리고 이제 그 종족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개인들 그리고 그 도시의 활력 이런

것들 속에서 불교가 탄생하고 그 제국의

왕들이 부처님의 제자였어요.

그러니까 이런 장면이 이제 굉장히 우리의

예상과 다른 운둔과 산정의 사상이 아닌 거죠.

그리고 그런 세속의 도시가

번성하기 때문에 당연히 문물이나 문화의

수준이 높아질 거 아닌니까? 그러니까

불교는 그것보다 훨씬 뛰어난 지성을

설파해야만 이 종교가 가능하잖아요.

 

그래서 도교의 지성을 안에 이제 품고 있다

이제 이런 것도 알게 되었고 부처님의 생애를

제가 한마디로 정의를 하면

환락의 늪에서 지혜의 바다로 이렇게 저는

규정하곤 하는데 그러니까 뭐 우리가 출가한

분들을 보면 저분들은 무슨 사연이

있을거야 이렇게 생각을 하시죠. 분명히 뭐

실연당했나봐 아니면 뭐 가족을 잃어서 슬픔에

빠졌나봐 이러는데 그런 식의

결핍을 가지고 출가를 하면 그 출가자의 삶을

오래 지속할 수가  없을 거예요. 제가 예전에는

카톨릭 신자여서 수녀님들을 많이

뵜는데 그대 제가 알았는데 수녀님들도 상처

받고 살연당해서 하는 게 아니더라고요.

그런 분들은 정말 그 생활 수녀원 생활

자체를 못 견디신데요.그게 더 힘들고 답답한

거야 실여당한 것 보다 불교는 부처님 자체가

왕자였고 그 다음에 왕자라고

다 행복한 게 아니예요. 왕권 다툼도 있고

또 아버지를 죽이기도 하고

우리가 궁중 비극을 사극에서 많이 보잖아요.

어느 나라나 비슷한데 부처님의 그 왕국

카필리바투라는 이 왕국은 굉장히 정말

아름답고 태평한 나라였고 그 다음에 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처님을 낳고

돌아거겼지만 그 이모부터 해서

굉장히 많은 사랑을 받았고

모든 백성의 사랑을 받았고요.

 

정말 겨울 궁전 여름 궁전 우기를 나는 궁전

궁전 3개를 다니면서 지상의 모든 줄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그런 엄청난 배려를 받은

그런 왕자였어요. 그러나까 어떻게 보면

그 청년기에 살아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기쁨을 다 누렸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그게 부처님한테는

그때는 이제 싯타르타 왕자죠 이 왕자한테는

그게 늪이였던 거예요.

그래서 어떤 결핍이나 상처가 있어서 출가한

게 아니고 이 환락 속에서

근본적인 질문 그런데 왜 " 삶은 괴로운가 " 예요 .

이렇게 많은 걸

누리는데 왜 괴로운가 그것을 아마 현대인이

저는 가장 잘 이해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정말 우리가 우리나라 중상류층도 그렇고

전 세계 부지들은 부처님이 누린 이 환락의 백배

천 배를 누리고 있어요.

아니 만 배일지도 몰라요. 그런데 거기서 자기

존재의 근본 문제가 해결되거나 해방감을 느끼지

못해요.이 청년 싯타르타 왕자가

이 환락의 절정에서 느낀 그런 근본적 질문을

가지고 성을 뛰어넘어 출가해서 어디에

도달했냐면 모든 것을 다 이뤘지만 완벽히

자기를 해방하는 그런 지혜의 바다에 도달했다.

이게 이제 불교에요.

 

그러면 우리가 불교 사상이 탄생하는 과정만 봐도

정말 청년의 파토스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게

어떻게 노년에 산전수전 겪고 이제는 세상이

참 적막하구나 이럴 때 터득하는

깨달음이 아니예요. 그렇게 해서 절대로 개달을

수도 없어요. 그러니까 가장 큰 오해가 이 사상이

청년의 사상이라는 걸  우리가 까먹었구나.

그걸 제가 발견하게 됐어요.

그런데 이제 모든 경전은 이렇지만 우리가 앞으로

이제 10강 동안 해야 하는 이 숫타니파타에 보면

이런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화살을 뻡아 버린 위대한 영웅은 사자처럼 숲

속에서 포효한다. 사자가 누구냐면 바로

싯타르타 왕자가 이제 깨달아서

고타마 존자라고 불리고 그 다음에 이제 붓다나

여래 세존으로 불리는 거에요. 바로 고타마

존자인 거예요. 그러니까 사자후를 막 그냥

뿜어내는 거예요. 이 카리스마가 느겨지지

않습니까. 이렇게 다 표현돼 있어요.

화살을 봅았다. 괴로움의 화살을 뽑은 거예요.

근데 이것은 어떤 제국의 황제도 하지 못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전 세계는 아니지만 지중해에서

시작을 해서 인도 까지 와서

그 세계를 다 정복했잖아요.

 

그런데 인간에게 있는 근본적인 독화살을 뽑지

못했고 진시황은 중국을 다 통일했지만 자기의

괴로움을 뽑을 수 없었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절대 수동적이고 이렇게

소심하고 그 다음에 운둔적이고 이런 식의

사상이 될 수가  없는 거죠.

그리고 이제 부처님을 묘사하는

표현 중에 어깨가 벌어지고

반점이 있는 장엄한 코끼리가 그 무리를 떠나

마음대로 즐기며 숲 속을 유유히 거닐 듯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제 앞의 것이 부처님의 모습인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이 가장 사랑하는 동물이

코끼리고요  그 다음에 사자 코끼리의

용맹함과 사자의 지혜 이 두 개가 바로

싯타르타 왕자 고타마 존자가 돼서

깨달은 그 불교라는 가르침을 상징하는

그 뭐라고 할까요. 아이콘이라고 할까.?

네 그렇습니다. 조금 감이 오실 수도 있는데

왜 우리가 우리 시대에 불교를 만나야 하는가.

 

저는 불교 신자가 아니고 불교를 고전 연구자로서

그냥 탐구하는 중인데 이거를 배우면 배울수록

지금 우리 시대에 뭐 청년부터

중년 노년에 이르기가지 전부 이런 가르침을

목말라 하겠구나. 라고 느꼈어요. 그 이유가

현대인의 병 대부분은 마음에서 옵니다.

다 마음이 괴로우시죠? 맛있는 걸 아무리 먹어도

그 다음에 쇼핑을 그렇게 해도 그 다음에

연애를 아무리 해도 마음은 괴로워요.

그러니까 많이 먹으면 당연히 아침에 괴롭잖아요.

다 자기가 너무 싫잖아요.그런데 연애를 해도

행복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모든 드라마가 연애가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주는 거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연애하면 괴롭다가 모든 드라마의

주제가 아니겠어요.

 

그래서 모든 병이 마음에서 오기 대문에 정말

지금은 정신 분석 심리 상담이

일상적인 시대입니다.

그리고 또 이 마음을 탐구하는데 서앙은

생리학이 이제 의학의 기본인데 마음이 어디서

작용하느냐 그러니까 뇌가 굉장히 중요하다.

그래서 뇌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어요.

그러니까 우리의 감정이나 아주 미묘한

것들도 이제 뇌 과학이 (감정)을 실함할 수 있게

돼버렸어요. 그리고 이제 요가를 비롯해서

너무마 많은 심리 테라피가 넘치는 시대입니다.

 

그리고 이제 몸이 아파도 결국 마음의 괴로움과

분리가 안되는구나 질병은 몸이 아프다 인데

번뇌는 마음이 괴롭다 인데 이제 분리가

안되죠.그런데 예전엔 이것을

분리했다는 말이죠.

질병 따로 생리 다로 심리 따로 그런데 이제

불가능한 시대가 됐다는 거죠. 그리고 이제

그걸 더 인식론적으로 이렇게 밀고 가면

우리라는 존재가 시공간하고 분리가

안된다는 것을  새삼 느낀 거죠.

우리는 우리가 원래 따로 있고 시간하고 공간이

따로 있어서  이렇게 플러스 된 줄 저는 그렇게

알았어요. 그래서 우주 바깥에

있다가 이렇게 시간 공간이 합쳐지는데 이렇게 

쏙 들어오는 걸로 그게 아니라 존재의

구겅 안에 이미 시공간이 있어요.

시공이 없으면 우리는 없는 거에요.

 

계절이 없는 곳에서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럼

결국 우리가 산다는 건 이 세계와 아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연결돼 있는데

그러면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지금

코로나 19 때문에 전 세계가 연결되어 있구나

한눈에 매일 실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데 이

연결 고리를 잃어버린 게 현대인들이에요

다 따로 따로 따로 이거를 분리한 다음에 그거를

합치느라고  아주 아주 고생을 합니다. 분리와

고립을 숙명처럼 알고 이거를

왜 당연하다고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혼밥족 혼술족 또 1인 가구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도시의 군중 속에  있으면서도

나와 외부는 분리돼 있다고 느끼는 거예요.

 

저는 이제 이 코로나 19가 끝나고 나면 두 가지

전 세계와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이 연결되어

있구나를 깨달을 것인지 아니면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사람들이 마음 속에 더 많은 고립된 섬을

갖게 될지 이 두 가지 양극단으로 갈 수

있는데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되 절대 존재가

고립되는 한 우리는 이 삶을 괴로움으로 밖에는

받아들일 수 없어요. 그런데 이게 이 코로나

이전에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 거죠.

이게 동양적 사유는 아니고 20세기에 들어온

서양 근대문명의 상물이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개인을 인디비듀얼 이라고 하는 게

인디바이드라고 분리할 수 없는 존재 그러니까

나는 완전히 다른 것하고 이렇게 떨어져서

존재할 수 있다는 환상을 일으키는 겁니다.

그런 개인들의 집함을 사회라고 하니까

이렇게 사회가 계약 관계는

되는데 커뮤니티가 안되는 거예요.

 

분리를 전제로 하니까 그러니까 돈이 지배하는

거에요. 그러면 사람들이 다 불안하고 허무를

안에 가지고 살아요. 다 불안하시죠?

알고 있어요. 그리고 인생이 뭐지? 라고 생각하면

굉장히 허무하실걸요?

그것도 다 알고 있어요. 왜냐하면 그냥 당연한

법칙이예요. 이렇게 살면 그래서 이걸 잊으려고

어떻게 하냐면 중독을 선택합니다. 옛날에는

알콜하고니코틴 이런 것만 중독인데

이제는 현대인들은 모든 것을 중독적으로 합니다.

 

쇼핑은 말할 것도 없고 취미 활동이

 

다 중독이예요.

만병이 거기서 다 일어난다는 거예요.

너무 애써서 어렵게 살지 않습니까.

너무 애를 쓰잖아요.

애를 쓰는데 애를 쓸수록 어려워지는

아주 역설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이 문명이 어디로 나아가는가를

생각해봐야 되는데

우리는 분명히 디지털 문명 안에 있어요.

그러면 디지털은 근대 문명이 아니란 말이예요.

그럼 디지털이 뭘까. 모든 이분법이 해체됩니다.

이 디지털 안에서는 그건 하나의 정보

흐름으로만 있는 거예요.

 

이게 우리 의식이 흐름으로 존재하는 거랑 굉장히

닮아 있거든요.그러면 우리가 고립되고 분리된

것을 숙명처럼 안고 사냐면 인간과 자연 존재와

세계 몸과 마음 개인과 개인 사생활과 공생하는

남성과 여성 동양과 서양 모든 것들을 적대적

이분법으로 만든 게 근대문명이에요.

그게 20세기에요.  그러니까 20세기는 그런

식으로 우리가 교육을 받고 세상이 그렇게

구성돼 있다고 믿었어요.

그런데 디지털은 그거를 다 용해시켜버렸어요.

디지털 안에 들어가면 이런 게 안통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드디어 이제 우리가 코로나 19는

바이러스가 동물에서 인간에게 전이가 됐잖아요.

인간과 동물의 이분법도

불가능하다는 거잖아요. 새로운 바이러스들은

더 많은 경계를 깨버리게 될 거라는 거죠.

 

그러면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과 존재의 몸에

대해서 다시 이 이분법을 벗어나서 이 대창조적인

어떤 관계를 복원하는 쪽으로 가야 합니다.

그게 이제 우리 시대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러면 이런 시대에 어떤 지도를 가져야 될까?

그것이 이제  동양 사상이 앞으로는 아마

세계문명을 선도할 거라고

저는 생각을 하고 동양 사상 중에 특히 마음을

탐구하는 것은 불교가 너무 압도적으로 대단한

정보와 지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거를 적극 활용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저먄 그렇게 느낀 게 아니라 제가 하고

있는 이 지식인 공동체에 청년들이 많은데

이 창년들이 불교를 엄청 좋아해요.

그걸 보고 깜짝 놀랬어요. 제가 지금 청년

붓다를 외치고 있지만 청년들이 그 두꺼운

경전을 읽고 뭔가 느낌이 있을

거라고는 참 기대하기 어렵죠.  그런데 세상에

그 두꺼운 초기 경전들을 읽고 자기 자신을

막 발견하는 거에요.

그래서 그것을 또 굉장히 경이로움으로

받아들이고  그래서 이게 시대가 정말

바뀌었구나를 느꼈고

그렇게 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불교는

신앙과 교리를 강요하지 않는다.

저는 당연히 불교 신자가 아니고

앞으로 불교 신자가 될 생각이 전혀 없어요.  

 

그 모든  존재에게 그 어떤 가르침이

될 수 있다는 것

어떤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질문과 해답

있다는 거 이게 굉장히 매력적인 것이죠 .

그래서 오래된 미래라고 하거든요.

고전을 정의할 때

아주 오래된 그 오래 된 것이 올라가면

2천 5백 6백 년 정도입니다.

모든 고전은 그때 폭발했거든요.

동서양이 그런데 불교도 2천 5백  6백 년 전

BC 5세기 전후해서 등장했는데  

 

" 바깥을 정복해서 나를 해방시키는 길은

이제 불가능하구나 " 를 깨닫고

" 내 존재 내면을 해방시켜서

삶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겠다 "

이 비전이 불교거든요.

 

그래서 이제 마음을 심층네 심층 무의식에까지

막 탐구해서 전생에 전생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나의 무의식이 내 부모 나를 낳기 전에 부모의

무의식 그 이전에 이미 어떤 마음이 작동했다.

이런 정도까지 들어가는 지성과 영성이기

때문에 저는 이것이 모든 인류

그리고 특히 밀레니엄

세대한테  아주 좋은 길잡이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숫타니파타는 그 중에서 가장 오래된 청년

붓다의 사자후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경전이기 때문에 여기부터

시작을 하기로 했습니다.

 

긴 내용을 단숨에 받아서 적을 수 있었던

공감대는 아마도 고미숙 작가님의

지성이 담고 있는 깊이었지 싶다.

 

 

 

 

생이라는 삶의 여정에서

마음의 상태가 어려울 때

혹여, 공감이 가는 내용을 만나서

어려운 마음의 상태를 여윌 수 있기를

작은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람하는 마음으로 담아 보았지 싶다.

 

2021.11.3.풀잎.

 

 

 

죽비 - 이남순

 

더 맑고

더 크게

 

비워내고 비워 낸

공명통 푸른 말쓴

겸허히 받아 쓴다

 

함부로 넘보지 마라

소리 죽여 듣는다.

 

<서정과 현실 > 2021.하반기호 중에서 발췌

 

 

 

풀잎 채널

 

Chopin - Joie De Vivre(삶의 기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