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그머티즘에 대한 이해
프레그머티즘이란 말은 행동 또는 실행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일반적으로 프레그머티즘을 실용주의로
번역하지만 어원적으로 보면 행동주의나
실제주의 또는 실험주의라고 번역해도
좋을 것이다. 프레그머티즘은 용어 자체가
시사하는 바와 같이 어려운 술어나 난해한
논리로 표현된 칸트나 헤겔류의 고원한
철학이 아니다. 프레그머티즘은 사변적이고
이론적인 철학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철학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논리적이며 체계적인 이론
보다는 실제적인 행위와 그 행위가 가져오는
효과 또는 그 행위의 결과 등을 보다 중요시
한다. 프레그머티즘에서 관념적인 사고보다
실제적인 행위를 중요시하는 까닭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본질을
행위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유함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함으로 존재한다. 사유란 행위를 낳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사유는 그 자체적으로
아무런 위미도 없으며 우리의 삶과 연관되어
어떤 행위를 산출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지게
된다. 즉 "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 "
" 약속은 지켜야 한다 " 는 생각 자체는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거짓말을
하지 않고 약속을 지키는 행위다.
모든 사상이나 이론은 그 자체적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오직 행동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무릇
한 사상의 의미를 밝히려면 그 사상이 어떤
행동을 낳는가를 밝히면 된다. 실용주의에
있어서는 행동이나 사상이 유일한 의미이다.
프리그머티즘 창시자 퍼어스는 어떻게
우리의 관념을 명석하게 할 것인가. 라는
논문에서 관념의 의미는 관념의 대상에
어떤 작용을 가해 보고 어떤 결과가 생기는
가에 의해 비로소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물이 단단하다고
했을 때 그 의미는 그것이 다른 물체로
긁어도 상하지 않는다는 것을 시험해 보고
나서 비로소 확정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물체가 무겁다고 했을 때
그 의미는 그 물체가 그것을 떠받치는 힘이
없어지면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는 경험을
할 때 비로소 명확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관념이나 개념이란 실험의 문제이다.
모든 대상이나 사물의 성질은 실험의 결과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프레그머티즘의 기본적 입장은 윤리적
개념에 있어서도 꼭 같이 적용된다.
즉 선, 가치, 행복, 정의 등과 같은 윤리적
개념도 사유를 통해 그 의미를 밝히려
해서는 안되며 실험적인 조작을 통해서
그리고 그 조작의 결과를 확인해 봄으로써
말하는 것과 같이 그 자체적으로 실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명사적 실체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동사적 부사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가치는 언제나 평가작용을
통해 드러난다.즉 구체적 상황 속에서
실천적 판단 행위에 의해
가치가 규정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병이 든 사람에게는 건강이 가장
절실하게 요구된다는 판단 아래 건강이
최고의 가치가 되며 가난한 사람에게는 돈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꼭같이 추구해야 할 절대적 가치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프레그머티즘은 가치 상대주의 입장 또는
다원론적 가치관의 입장에 선다고
볼 수 있겠다.
프레그머티즘은 사상적인 뿌리를 영국의
공리주의와 꽁트의 실용주의에 두고 있다.
공리주의는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목표 아래 공리성과 실용성을 강조하는
도덕 사상이며 실증주의는 자연과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검증할 수 있는
지식이나 관념만을 참으로 받아들이여는
철학적 사조를말한다. 따라서 프레그머티즘은
이러한 사상적인 배경 아래 유용성과 검증성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다. 유용성이란
인간의 실제 생활에 있어서의 효과를 말하며
검증성이란 인간의 경험에 의해
드러나는 실증성을 말한다.
인간의 관념이나 지식,
이론이나 학문 등은
모두 실용적인 가치가
있을 때만이 진리요 참이다.
이것들이 참인가 아닌가는
생각이나 말로만 따질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효과 혹은 실제적인 결과가
어떠한가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이러한 기준에 따른다면 모든 지식이나
이론이나 학문은 우리의 실제적인
행동이나 생활에 이익을 가져오거나
유용한 영향을 끼칠 때 또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야기할 때 그것은 참이요 진리가
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제임스는
진리에 대하여 그것은 참이기 때문에
유용하며 유용하기 대문에 참이다
라고 하여 " truthful " 한 것과
" useful " 한 것은 동일시하였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산 속에서 길을 잃어
어떻게 인가를 찾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고 하자. 이 때 만일
우리가 소의 발자국을 발견하여 소
발자국이 있다면 근처에 인가가 있음이
틀림없다. 는 생각 아래 그것을 따라
인가가 있는 곳까지 갈 수 있었다면
그 소 발자국은 우리의 실제적인
행동과 생활에 매우 유익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즉 소 발자국은
길을 잃은 사람이 인가에 도달하도록
하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온 유익한
도구와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제임스에 의하면 진리란 바로 소 발자국과
같은 역할을 해야하는 것이다.
프레그머티즘에 있어서 인간의 삶과는
독립해 있는 진리 자체라든가 영원불변의
진리와 같은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왜내하면 이런 것들은 인간의 실제 생활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어서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진리가 어떤 가치를 가진다면
그것은 항상 어떤 효과를 산출하는 기능적
가치를 가질 뿐이다. 프레그머티즘의
이러한 진리관은 파스칼의
다음과 같은 말을 연상케 한다.
우리가 보는 정의나 불의는
계절과 기후가 변함에 따라
그 성질도 변하지 않을 수 없다.
위도의 3도 차이가 모든 법률을
뒤집어 엎으며 자오선 하나가
진리를 결정한다.
냇물 하나로 막을 수 있는
우스꽝스러운 정의여!
피레네 산맥 우측의 진리는
좌측의 오류인 것이다.
진리는 마치 우리의 경험이 각기 다르듯이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진리와 가치,
이론과 사상, 도덕과 윤리 등은 고정되고
완성된 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며 인간의 경험 속에서 수정되고
발달한다는 것이 프레그머티즘의 입장이다.
프레그머티즘에 있어서 진리와 가치의
또 하나의 기준은 검증성이다.
프레그머티즘에 있어서
모든 진리와 가치는 우리의 경험을
통해 검증 가능해야 한다.
검증할 수 있는 것만이 참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거짓이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불을 처음 보았을 때
저것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는데
이 때 가장 확실한 지식은 불에 손을 넣어
보거나 불 가가이에 손을 갖다 대보는
것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 어린아이는
불은 뜨겁다는 지식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지식이야말로 가장 확실하고도
유익한 지식이 된다.이런 측면에서
실용주의자들은 철학에서 주장하는
모든 형이상학적인 지식들은 허구적인
것으로 부인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지식들은 검증가능한 객관적인
지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세계의 궁극적인 실체는
정신인가 물질인가 ? 이 세계는 자유인가
필연인가. 역사의 발전 법칙은 무엇인가.
등에 대한 물음에 우리가 어떤 대답을 얻게
되든 그러한 대답은 검증 가능한 지식이
될 수 없다. 또한 칸트가 말한 물자체라든가
헤겔이 말한 이념이나 세계 정신 등과 같은
개념도 우리가 경험을 통해 검증할 수 있는
것이므로 공허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와 같이 프레그머티즘에 있어서는 실천적
행위에 있어서의 유용성과 과학에 있어서의
검증 가능성을 진리와 가치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런 기준으로 볼 때 종교적
진리와 가치는 어떻게 인정할 수 있겠는가.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프레그머티즘에서는
종교의 가치와 진리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신에 대한 관념을 비롯한 모든
종교적 진리는 그것이 비록 겅증불가능한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
유익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제임스에 의하면 우리가 종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때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이 우리의 삶에 유익한가?
신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행복을
증가시키는가? 종교적 신앙이 우리의
삶에 용기와 희망을 주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만일 긍정적인
대답을 얻을 수 있다면 신에 대한 믿음을
유용성이라는 측면에 있어서 진리로
받아들여질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제임스는 절대적인 신이 존재하고
인간이 그 신과 함께 있다는 의식은
우리의 삶을 고무한다고 보았다.
제임스에 의하면 신에 대한 믿음이나
내세에 대한 확신과 같은 종교적
체험은 인간의 삶을 긍정하게 하고
능동적인 힘을 불어 넣어 준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인간의 삶을 도덕덕이게
하고 생명의 존엄성을 가지게 하며
좌절과 절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우리의 마음에 깊은 평화를 심어 준다.
제임스에 의하면 우리가 진리를 대할 때
항상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명령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첫째는 " 잘못을
저지르지 말 것 " 과 둘째는 " 진리를
믿을 것 이다. " 첫번째의 명령은 소극적인
면에서 비진리에 빠지지 말아야함을
의미하는 것이며 두 번째의
명령은 적극적인 면에서
진리를 믿고 그 진리대로 살아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리를 추구할 때 오류에 빠지기
쉬운 이유 가운데 하나는 진리에 대한
열정 때문에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로
받아들여 믿게 되는 경우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이비종교에 빠지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따라서 우리가
이러한 잘못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제임스가 말한 첫 번째의 명령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진리에
접하는 것을 주저하고 진리를 멀리 한다면
진리를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보다 적극적으로
진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진리를 믿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이 두 명령은 서로
상반되는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
첫 번 째 명령을 따르려다 두 번째 명령을
놓칠 수가 있으며 두 번째 명령을 따르려다
첫 번 째 명령을 놓칠 수가 있다.
제임스는 이 두 가지 명령을 다 지키는 것이
바람직하나 만일 이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두 번 째의 명령을
선택하라고 권고한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진리에 대한 열망 때문에 자칫
비진리에 빠질 수도 있으며 동시에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야 되겠다는 생각 때문에
진리를 믿는 것을 주저하고 포기할 수도 있다.
이 두 경우 드러난 결과에 있어서 그 잘못은
반반이다. 즉 첫 째 것을 따르기 위해 둘째
것을 포기하는 잘못과 둘 째 것을 따르기
위해 첫 재 것을 포기함으로 생기는 잘못은
반반이라는 것이다. 제임스는 " 희망으로
인하여 속는 것이 두려움으로 인하여
속는 것 보다 나쁠 것이 어디 있는가? "
라고 반문하며 만일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과 진리를 믿는 것이 곡 같이 중요하다면
그리고 이 둘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차라리 진리를 믿는 족을
선택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권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진리를 믿을
기회가 최소한 반은 주어지기 때문이다.
종교적 진리에 대한 제임스의 이와 같은
입장에 대해서는 종교의 본질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결여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게될 수 있겠으나 어쨌든 프레그머티즘은
종교적 진리까지도 유용성과 검증성이라는
잣대를 놓고 재단하려고 하는 지극히
가치 현실주의적인 입장 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겠다.
" 철학 이해와 철학 상상력
- 남청 책 중에서 발췌 "
요즘 읽고 있는 책의 내용이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아서
조금 담아 보았지 싶다.
2021.1.11.풀잎.
2022021. 1. 11. 23: 1. 1. 11. 23:
'사유 - 자각의 기쁨 > 말씀의 진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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