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이 꿈꾸는 전원의 삶 풍경
나의 노후 복지가 담긴 풍경
어쩌면 나의 현재는 이보다 더 풍족한
삶의 형태 속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모든 바탕에 감사함으로 현재가 있기에
꿈을 지닐 수 있는 나의 미래가 담긴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넓은 테라스가 있는
작은 바위와 다양한 나무 다양한 꽃으로
꾸밀 수 있는 예쁜 정원이 있는 집
자연 속에서의 삶
희망으로 담아 보는 시간이지 싶다.
오랫동안 꿈을 그린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 간다.
ㅡ 앙드레 마를로
2025.2.12.풀잎.
명상에 대한 나의 이해
ㅡ 내 안의 눈높이를 찾아서
나에게 있어서 명상의 세계란
어디쯤에 앉아 있는 자리일까.
종교라는 진리 안에 가두고 싶지 않다.
결코, 추상적인 이치에 있지 않는 세계에
대한 많은 경험이 지니고 있는 영혼의 세계
근본 본질의 공부를 통해서
화엄의 과정을 뛰어 넘어야
선을 구할 수 있는 과정임을
인식할 수 있는 모든 체험이
말하고 있는 경지에 있음
선으로 더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말씀하신 어떤 큰 스님의 어떤 법문처럼
그 무량한 세계를 묻고 싶지는 않다.
가부좌를 틀고 앉는 가지런한 자세에서
고요가 내 안에 흐르면
명상은 진부한 나의 일상에
자극을 줄 수 있는 죽비가 된다.
흐트러져 있는 심신의 소란스러움이
가지런히 정련할 수 있는
시간에 앉아 묵상을 하면
내 안의 시끄러움을 반추할 수 있는
나 자신과의 대면이 되기 때문이다.
들숨과 날숨의 흐름을 인식하는
한 호흡 한 호흠을 쉴 수 있는
현재 의식을 지켜보는
또 다른 의식 ( 관찰자 ㅡ 죽어도 죽지 않는 존재 )
초입자로 된 광자라는 뜻으로 알고 있는 것이
맞는지 모르지만 색,수,상,행,식,이라는
오온이라는 근본 무명이 가리고 있는
빛(광명)이라는 것일까? 해서, 근본 무명에
가려져 있는 빛이 지속하기란 어렵지 싶다.
잠깐 방심하면 근본 무명이 나를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끌고 다니기 때문이지 싶다.
다시 알아차림을 통해서 근본 본질(관찰자)의
직절 근원 눈 높이에 머물 수 있는 삼매가
되었을 때 찾을 수 있는 평온함이지 싶다.
해서, 알아차림의 몫이기보다 나의 명상은
단지 일상 안에서 흐트러진 마음의 질서를
추스를 수 있는 범위에 앉아 있고 싶다.
가부좌를 틀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면
그토록 원했던 간절함
그토록 원했던 자유로움
그토록 원했던 충만함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나의 묵언은 어디쯤에 앉아 있는 것인지.
어디쯤에서 듣지 못하는 것인지.
어디쯤에서 보지 못하는 것인지.
침묵이 머무는 고요 안에 나의 부족한
일상을 담그면 수면 위로 떠오르는 무수한
빈 쭉정이 민낯이 내면의 무색함을
드리운 채 아우성을 친다.
수면 위로 둥둥 떠다니는
수많은 생각의 부평초
하나하나 거둬낼 수 있는
청정심에 머물 수 있는 바탕
모든 법문을 접할 때 마다 느낄 수 있었던
고도의 지성을 필요로 하는 그 자리
수많은 소란스러움이 찾아와 자문을 할 때
이쯤에서 스스로 정화할 수 있는
내면의 세계에 대한 눈뜸이 지니고 있는
마음의 평화 그 깊이가 나에게 있어서
그 세계 안에서 명상의 의미를 지닌다.
해서, 내 안의 눈높이는 평온함을 지향한다.
2018. .8. 18. 풀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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