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 미학(休) ㅡ 내면의 일기

사유 - 자각의 기쁨/말씀의 진리

공자 - 중용 18

풀.잎. 2010. 3. 26.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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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九

 

子曰

[武王. 周公, 其達孝矣乎! (무왕. 주공, 기달효의호!)

 夫孝者, 善繼人之志, 善述人之事者也

(부효자, 선계인지지, 선술인지사자야)

春秋脩其祖廟, 陳其宗器, 設其裳衣, 薦其時食 ]

(춘추수기조묘, 진기종기, 설기상의, 천기시식)]

宗廟之禮, 所以序昭穆也. (종묘지례, 소이서소목야,.)

序爵, 所以辨貴賤也 (서작, 소이변귀천야)

序事, 所以辨賢也. (서사, 소이변현야.)

旅酬下爲上, 所以逮賤也. (여수하위상, 소이체천야.)

燕毛, 所以序齒也, (연모, 소이서치야)

踐其位, 行其禮, 秦其樂, 敬其所尊, 愛其所親, 事死如事生, 事亡如事存, 孝之至也

(천기위, 행기례, 진기락, 경기소존, 애기소친, 사사여사생, 사망여사존, 효지지야)

郊社之禮, 所以事上帝也. (교사지례, 소이사상제야.)

宗廟之禮, 所以祀乎其先也. (종묘지례, 소이사호기선야.)

明乎郊社之禮, 褅嘗之義, 治國其如示諸掌乎!

(명호교사지례, 체상지의, 치국기여시제장호!)

[선생께서 말씀하시길 (무왕과 주공은 효의 모든 것을 깨달았구나! 효는 선인의 뜻을 잘 이어가고

선인의 일을 잘 발전시키는 것이다. 봄과 가을로 조상의 묘를 바로 하고 조상의 물건을 진열하고

의복을 펴놓고, 때에 맞추어 드렸구나)   종묘를 지내는 예는 소위 차례를 밝힌 것이다.

작위에 따라 귀천을 밝히고, 일의 차례를 따라 똑똑한 이에게 맡기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술을 따르는

것에는 천한 사람도 포함되는 것이다. 제사 후에 연령의 차례를 가리는 것을 燕毛라 한다.

선친의 위에 올라가 예를 행하고 음악을 연주하며 선인이 존중하던 것을 공경하고 선인과 가깝던 이들을 아끼며 죽음을 삶과 같이 여기고 없음을 살아 있는 것과 같게 여기는 것 이것이 효의 극치이다.

교사(郊社; 하늘과 땅에 대한 제사)의 예는 옛 천자들을 섬기는 길이며 종묘의 예는 자기 조상을 제사하는

것이다. 교사의 예와 체상(褅嘗: 천자가 태조를 지내는 제사와 사시 사철에 지내는 제사)의 뜻을

명백히 알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손바닥 들여다 보듯 할 것이다.]

 

앞 19장에서 효가 덕의 근본임을 살폈고 이 장에서는 효의 또 다른 효용을 알게 된다.

효란 상하관계이니 결국 질서의 문제요 사람 사이의 질서는 예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즉 효에 達하였다는 것은 사람 사이의 질서를 禮로서 잘 이루는 지혜가 있다는 것이니 만사에 통하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지내는 제사도 단지 그 복잡한 형식에 넌덜머리를 칠 것이 아니다.

물론 그 형식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매이면 잘못이겠으나 사람 사이에 예는 그 형식도 중요한 것이니

대통령이 나이가 어리다고 나이 많은 장관이 하대하면 국사가 바로 설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제사의 禮에서 순서를 정함은 정치에 관직을 두어 그 책무를 맡김과 같고 옛 왕들이나 대통령들의 영정을

모시는 것은 과거를 교훈 삼는 의미가 있으며 사철의 제사는 자연을 살피는 것이니 요즈음으로 말하면

국무총리산하 기상청 등 국가 기관이 국민의 삶을 보호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의 이치가 바로 서면 나머지도 같은 이치인 것이다.

그 중에 제사의 형식은 나라를 다스리는 형식과 같은 것이라 이에 달통하면 나라의 다스림도 달통한 것이다.

이러한 달통은 효가 그 근본 마음이니 효란 인간의 개인적 측면에서나 전체적 측면에서나 모두

그 근본이 되는 마음가짐인 것이다.

 

事死如事生, 事亡如事存: 죽었다는 것은 산 것과 같고 없어졌다는 것은 존재한 다는 것과 같다

 

죽은 조상의 일이 산 후손의 일에 참고가 되니 산 것과 같고

죽은 조상의 생각이 산 후손의 생각을 이룬 것이니 산 것과 같고

삶이 죽음의 연속적 과정이니 죽음과 같고

어제의 내가 없어졌기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같이

조상의 죽음은 나의 삶으로 이어진 것이니 산 것과 같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A라는 컴퓨터의 정보와 소프트웨어들을 B라는 컴퓨터에 옮겨놓고 A컴퓨터를 없애버렸으면

본체는 A에서 B로 바뀌었으나 생각하고 일하는 패턴(정신)은 A컴과 다르지 않으니

이 때에 컴퓨터 B는 A와 다르다 해야 할까 같다고 해야 할까?

우리가 A라는 사람을 만나서 이 사람은 A이다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외모 뿐 아니라 그 사람의 생각과 행동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생각과 행을 떠나서 A를 말함은 죽은 송장을 A라 하는 것과 같아서 A송장 B송장의 구별은 삶에서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혜가 열리기 힘든 것은 몸을 근거로 我(나)를 생각 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공자님이 나를 근거로 도를 살피는 것보다 만물의 이치를 연구하라 하신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컴퓨터 B는 이제 A와 다름 없는 패턴으로 움직이니 이것은 A의 죽음이 아닌 것이다. 즉 事死如事生인 것이다.

 

좀 더 깊은 이해를 위해 우리가 [나]라는 생각을 일으켜 이 몸을 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자.

나란 무엇이고 왜 우리는 지금 현재의 이 몸을 중심으로 나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일까?

 

우선 觸(접촉)을 살펴보면 누군가 나의 몸을 때리면 아프고 그 아픈 감각은 우리의 피부가 경계가 되어

발생한다. 이 발생된 감각이 우리가 원치 않는 것이면 화가 나는 것이니 화나는 내가 있다고 인식한다.

즉 피부를 경계로 기분 나쁜 감각이 발생하여 화가 난 내가 있게 되는 것이니 피부를 경계로 나를 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는 것은 눈을 경계로, 맛은 혀를 경계로, 소리는 귀를 경계로, 냄새는 코를 경계로 하는 것이다.

만약에 감각이 있던 없던 화를 내는 주체가 없다면 나라는 생각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감각과 같은 화를 낼 판단의 정보가 없어도 나라는 생각은 없는 것이니

결국 나의 성립은 정보와 이를 판단하여 반응할 수 있는 능력(마음)이 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경계로 나를 삼는 것은 틀린 것이니

우리가 겨울에 두꺼운 옷을 입으면 그 옷 밖을 경계로 감각이 이루어져 옷도 내가 되야 하고

뚱뚱한 이가 살이 빠져 날씬해지면 과거에 살이 차지하던 공간도 나이기 때문이다.

교통사고로 팔이 절단 되면 그 팔만큼 내가 줄어야 하겠으나 그러하지 않은 것이니

경계로 나를 삼는 것은 틀린 것이다.

 

정보를 판단하는 능력을 나로 삼는 것도 틀린 것이니

컴퓨터의 소프트웨어가 능히 정보를 판단하여 아이콘으로 기쁨과 슬픔을 나타내지만

그 컴퓨터에 나라 할 존재가 따로 없듯이 정보를 판단하는 능력을 나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컴퓨터는 나라는 생각을 하지 않지만 우리는 할 수 있으니 다르다 하지 마라.

세포가 능히 자아를 삼아 살아가지만 나라는 생각을 사람처럼 하는 것은 아니다.

생각이 단순하고 복잡한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생긴 바 이치가 다른 것이 아니니 사실이 이러함을 알아야 한다.

 

이런 논리를 떠나 실제의 삶에서 살펴보자.

누가 나를 건들면 화가나니 몸이 나인 것이다.

누가 물건을 훔쳐가면 화가나니 물건이 나인 것이다.

누가 자식을 패면 화가나니 자식이 나인 것이요

누가 나라를 모욕하면 목숨 걸고 싸우는 것 나라가 나이기 때문이다. 

두두물물 나 아님이 없는 것이다.

 

몸의 경계 나라 함도 한 생각이요

몸만 내가 아니라 함도 한 생각이다.

한 생각이 바로서면 평화의 나라

한 생각이 어긋나면 악귀의 나라.

 

이치가 이러하니 無我(무아)라 하지 마라

부처님의 무아는 몸을 근거로 나라 하는 고집(생각)을 바로 하는 것이지

이렇게 훌륭히 살아 숨쉬며 오늘도 함께 잘 살려고 애쓰는 생명들의 실존을 부정함이 아닌 것이다.

부처님은 항상 무명의 생각을 돌려 지혜의 생각으로 바꾸는 말씀을 했지 무엇이 없고 무엇이 있다는

개념의 정의를 내리시지 아니하니 지혜의 눈에는 그러한 개념을 내릴 수 있는 일정한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불자들에게 無我만 말하지 마라 이러한 말로 인해 두 가지 부류가 양산되는 것이니

 

첫째가 이 말을 듣고 두렵고 황망하여 마음이 갈 곳 몰라 하고 그러한 까닭에 신앙심에 집착하고, 미륵이다

관세음이다 뜻 보다는 실존으로서 부처의 존재에 집착하며, 윤회에 집착(티베트 라마승)하고,

극락에 집착하며, 결국은 세상과 동떨어진 생각에 집착하여 현실의 중요성을 잊고 살게 하는 것이다.

 

둘째 부류는 무아의 뜻은 알아듣고 나 없음에 집착하여 마음 갈 곳을 몰라 하고 도리에 집착하여

매사에 공이라 하며 유유자적한 양 도가의 사상을 닮아가는 것이다.

空은 공인데 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니

노자의 가믈한 덕처럼 이해하고

아는 것도 가물가물 행동도 가물가물

자신의 소견이 가물거리니

이것도 저것 같고 저것도 이것 같아

꼬치꼬치 캐묻지 못하게 하고

따져서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며

자신만의 특수한 체험을 앞세우고

일체의 생각을 놓으라 한다.

스스로도 생각 하면 골치가 아픈 거다.

무조건 관하거나 무조건 앉으라 하여

아무 생각 없는 곳에 귀신 굴을 짖고 앉아서

나 홀로 태평이다.

누가 와서 묻되 나는 이러한 고통이 있으니 어찌 하리까?

하면 그저 생각을 놓으라 하고 화두를 들라 할 뿐 자신이 해줄 말이 없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육조 스님이 제자를 접하여 모두 말로 깨닫게 했으니 이 것이 스스로의 부족함인 줄 알아야 할 것이니

이대로는 잘못하면 막행막식이요. 잘되 바야 사기꾼이다. 

 

지금 말한 이치는 많은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이치이고 착각이 많은 이치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여러가지로 언급하여 볼 것이다.

 

무아! 무아! 하다 보면 욕심도 없어지고 욕심이 없어지니 패배주의가 되는 것이요.

자손들에게 가난을 전수하게 될 것이니 작게는 패가망신의 이치요 크게는 나라를 말아 먹게 되는 첩경이다.

공자님이 말씀하시되 과거의 나(조상)가 지금의 나며

지금의 나가 미래의 나(자손)이니

나의 삶이 막중함을 알게 하시는 것이며

이 것은 효를 오로지 하여야 이루어진다고

친절히 간곡히 알려주시는 것임을 명심하자.

공자 - 중용 20  (0) 2010.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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